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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렵 채집 생활에서 가축 사육과 농경생활로의 전환

나일강 계곡 유적들로는 중석기시대 수렵 채집 생활자들이 신석기시대 최초의 거주민이 되는 과정을 자세히 설명하기 힘들다. 사냥, 고기잡이, 채집을 하면서 살았던 아석기인들은 변화하는 환경에 더욱 잘 적응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들이 정말 기존 생활 형태를 하루아침에 다른 형태로 바꿨을지는 의문스럽다. 어쩌면 처음에는 기존 방식이 존속하는 가운데 식물 경작과 가축 사육이 점진적으로 이루진 것일 수도 있다.

 

이런 추측은 그저 하나의 가설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농경생활자들이 최초로 정착한 장소가 그 이전 시기에 수렵 채집 생활자들의 야영 장소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나일강 계곡에 살았던 최초의 신석기인이 남긴 유적을 보면 한 장소에서 일정한 기간만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유적지에서는 조리용 모닥불 자리, 웅덩이, 주위에 산재해 있는 유물 말고는 별다른 것이 발견되지 않았고 가옥의 건축에 대해서는 더더욱 흔적이 남아 있지 않다. 여전히 식량 조달에서는 고기잡이가 주를 이루었고 습하고 비옥한 지대에서는 식물을 채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전 시기와 다른 매우 큰 차이가 나타났는데 즉 사람들은 더 이상 대형 포유류
를 사냥하지 않고 가축을 기르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이후 이들의 삶에서 점점 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다른 지역에 비해 파 저지에서의 문화는 다음 단계에 도달하기까지 더 오래 시간이 소요되었다. 이에 비해 나일강 계곡과 특히 나일 삼각주 지역에서는 신석기시대로의 전환이 더 신속히 이루어졌다. 이는 어쩌면 근동아시아와 더 가깝기 때문일 수도 있다. 나일강 계곡에서는 더 장기적인 주거지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비축 식량 저장을 위한 시설물이 더 많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발견된 동물 뼈로 추정해볼 때 사냥은 현저히 후퇴했다. 

 

이후 문화가 더 발전하면서 주거지는 확실히 더 커졌고 복잡해진 양상을 띠었다. 파 저지와 상이집트 나일강 계곡에서 아기
대가 더 오래 지속되었던 이유는 이곳의 기후와 환경이 사냥, 채집, 고기잡이를 주로 하며 살았던 생활 및 경제 방식에 매우 유리하게 작용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와 관련해 흔히 일명 생태적 브레이크가 거론된다. 

 

즉 생태적 브레이크로 인해 파윰과 상이집트에서의 발달이 하이집트 지역보다 늦어졌다는 것이다. 하이집트 지역은 근동아시아 문화와 가까이 있다는 점이 유리하게 작용했다. 요컨대상이집트에서 신석기가 뒤늦게 시작되었던 것은 생산 경제, 정착생활 등의 신석기가 시작되기 위한 결정적 자극이 근동에서 먼저 이집트 나일강 계곡에 전달됐고 그곳에서 점차 다른 지역으로 확산되었다는 사실과 관계있다.

 

이집트 나일강 계곡이 세계에서 초기 농경생활이 시작된 원조 지역에 들지 못한 이유는 이곳에 최초 재배 식물의 야생종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단순한 사실에서 찾아진다. 때문에 이 지역에서는 이 식물 종이 먼저 근동아시아에서 들어온 뒤에야 농경이 발전할 수 있었다. 비록 식물 재배의 시작은 늦었지만 나일강 계곡은 규칙적인 홍수와 충적층의 발달로 인해 토양이 매우 비옥했고 따라서 농경에 이상적이었다. 근동아시아와 같은 신석기시대의 생활 및 경제 방식이 나일강 계곡에 영구 정착하게 된 것은 기원전 5500년 이후가 되어서이다. 이 시기 더 서남쪽, 오늘날 이집트에 속하는 사하라 동부 지역(납타 플라야, 비르 키세이바)에서는 비교적 더 다습한 기후 탓에 이미 약 3000년 앞선 시기부터 사람이 살고 있었다.


이들은 토기를 생산했고 수수를 채집했으며 일찍부터 소를 길렀다. 여름 몬순식 강우가 점차 쇠퇴하면서 홀로세 중반기부터 사하라의 건조화가진행되었다. 그 결과 기원전 4000년경부터 이 생활 공간은 점차 버려졌고 이곳에 살던 사람들은 더 나은 생존 조건을 제공하는 비옥한 나일강 계곡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하이집트에서 가장 오래된 신석기 문화 중 하나는 일명 파윰 A 문화이며 파유미안 문화라고도 한다. 이 문화보다 바로 앞서 있던 문화는 위에서 언급했던 이석기에 속하는 파윰B 문화(카루니안)다.

 

카루니안 시기에서와 비슷하게 파윰 A 문화 유적지도 주로 파 호수 북쪽 호숫가에 분포되어 있다. 파 문화는 늦어도 기원전 5000년대 후반기부터 기원전 3000년대 초까지 지속되었다. 파윰 A 문화에 파윰 B에서부터 지속적으로이어지고 있는 전통이 나타난다는 사실은 파 저지대에서도 수렵 채집 생활에서 농경 정착 생활로의 이행이 점차적으로 긴 과정을 거쳐 이루어졌다는 추측을 낳는다. 

 

파윰A 시기에는 이미 불 피우는 자리가 100개가 넘고 식품 저장 웅덩이 흔적이 다수 발견되는 대형 주거지가 있었다. 이
웅덩이들은 곡식 저장소로 이용되었고 200킬로그램에서 300킬로그램 정도의 곡물을 저장할 수 있었다.  저장소는 당시 파 호수의 주기적인 범람 위험에서 안전한 높은 지대에 위치해 있었다. 곡식 저장 웅덩이를 선정하는 데서 이런 고려를 했다는 사실은 사람들이 이 주거지에 지속적으로 거주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이외에도 특정 계절에만 또는 단기적으로 이용되었던 많은 유적지가 존재한다. 이런 유적지에서는 불 피우는 자리 몇 개만 발견되었으며 더 구체적인 건물의 잔해는 발견되지 않는다. 이 장소들에서 발견된 유물의 총목록을 살펴보면 이 장소들은 사냥 거처 또는 사냥 포획물을 토막 내는, 말하자면 도축장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런 장소는 모두 파윰 호숫가 부근에 분포해 있었다. 파윰A 문화 시기 유적지를 관찰하면 동물의 가축화는 아석기 문화가 지속적으로 발전해서 생긴 결과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혹시 신석기시대 이전에 이 문화인들은 야생동물을 포획한 후 잡아먹을 때까지 먹이를 먹
이면서 일정 기간 동물을 길렀던 것은 아닐까?

 

실제로 이 과정이 고기라는 자원을 계획적으로 사용하기 위한 첫걸음이었을 수 있다. 물론 이후의 가축사육은 가축을 의식적으로 사육시킴으로써 이와는 완전히 다른 차원에 이른다. 이와 함께 아석기시대부터 발견되는 야생 풀 씨앗 알갱이와
야생 곡물을 작게 가는 데 이용되었던 갈판과 갈돌은 식물 경작 또한 아직 시작되기 전 단계에 있었음을 말해준다.


이 주거지 유적에서 가옥 형태를 추정할 수 있는 흔적으로는 조리용 모닥불 자리 잔해, 땅속에 기둥을 박았던 간헐적인 흔적, 실내 바닥 잔해, 벽 파편만이 전해진다. 하지만 이 유적이 속한 지층에서는 다량의 석기 외에도 최초의 토기와 물고기 및 동물 뼈 다수가 함께 발견됐다. 이곳에서 발견된 토기는 파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손으로 만들었으며 투박하고 비대칭적인 모양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