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플라이스토세 말엽의 수렵 채집 생활자

 

플라이스토세 말기 나일강 계곡에서는 사람들이 수렵 채집 생활을 하며 살고 있었다. 당시 기후는 더욱 건조해져 초원 지대가 메마른 사막으로 바뀐 상태였다. 하지만 나일강의 상습적인 범람은 강 양안에 비옥한 지대가 발달하게 했고 이는 후기구석기인에게도 매력적인 생활 환경이었다.

 

이 시기 나일 계곡에 존재했던 유적지는 대부분 크기가 작은 편이었고 한 시기에만 반복해서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사람들은 나일 강가의 습지와 풀밭에서 식물을 채집했다. 그중에서 단연 인기 있었던 것은 사초, sedge의 일종인 향부자였다. 비옥한 지대에 면해 있는 모래 언덕에서는 사냥을 했고 나일강의 풍부한 어장에서도 식량을 마련했다.


와디 쿠바니야에서 발굴된 유적은 후기구석기시대 말엽 나일강 계곡의 생활 및 경제 상황에 대해 많은 정보를 알려준다. 이 유적지는 아스완 지방에 있으며, 이 유적지의 이름을 따라 그 시기 전체를 쿠바니얀 시기라고 부른다. 선사시대 고고학에서는 문자 자료가 없기 때문에 이름을 사용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 까닭에 여러 문화 현상의 특징을 더 많이 보여주는 중요 유적지의 이름을 따라서 그 문화를 명명하게 된다. 

 

와디 쿠바니야 유적지는 후기구석기시대 수렵 채집 생활자들이 나일강의 특수한 생활 환경에 어떻게 적응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때 발달했던 새로운 변화들은 홀로세 초기에도 계속되다가 이후 점차 농경생활에 자리를 내주었다. 와디 쿠바니야에서 신석기인은 나일강 계곡의 천연자원에 상당히 의존했고 습하고 비옥한 지대의 야생식물과 강 물고기를 주요 식량 자원으로 삼았다. 유물 자료를 살펴보면 식물성 식량은 어느 정도 다양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반해 충분한 고기를 확보하게 해주었을 법한 대형 포유류는 식량 조달에서 거의 별다른 역할을 하지 않았다. 

 

자연환경이 바뀌면서 그런 동물이 서식하기에 더 이상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발굴 자료에서는 하마, 야생 당나귀, 토끼, 오록스, 가젤의 잔해가 소량으로만 확인된다. 가젤과 오록스는 사냥하기 쉬운 동물이었는데도 안정적인 식량 공급원이 전혀 아니었던 것 같다. 

 

이에 반해 어류는 와디 쿠바니야 주민들에게 몹시 중요했다. 물고기 뼈가 10만 개 넘게 발굴되었고, 그중 대부분이 큰 메기 뼈였다. 낚시는 주로 두 계절에 행해졌다. 봄에 강이 범람하기 시작하는 때와 가을이다. 나일강에서는 사철 내내 고기를 잡을 수 있었지만 여름과 겨울은 어장 크기가 확연히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와디 쿠바니야에서 나온 식물 잔해에는 다양한 씨앗, 열매, 기타 식물이 있었다. 야생 향부자는 필요한 탄수화물의 상당 부분을 충족시켜주었던 것으로 보이며, 따라서 이 지역 주민들 에게 특히 중요했다. 

 

향부자는 나일강 계곡 전역에서 널리 자랐으며 지금도 서식한다. 다량 출토된 갈판과 갈돌은 당시 주민들이 야생 풀에서 채
집한 씨앗을 갈아서 이용했음을 보여준다. 이 씨앗들은 대부분 향부자에서 나온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생강과자나무라고도 부르는 동야자Dum Palm 열매도 채집했는데, 이 식물은 그때나 지금이나 나일강 계곡 전체에 널리 분포되어 있다.


플라이스토세 말기에는 아프리카 대륙에 장기적인 영향을 끼쳤던 커다란 기후 변화가 일어난다. 마지막 빙하가 계속 녹아내리면서 이미 약 1만5000년 전부터 시작되었던 온난화는 훨씬 더 많은 강수량을 초래했다. 홀로세로 이행하면서 몬순 지대는 북상했고 이 때문에 기후는 더욱 습해졌다. 

 

나일강의 수위는 현저히 상승했고 강의 범람은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특히 결정적이었던 것은 강이 엄청난 규모로 범람하면서 비옥한 토양을 만들어냈고, 그 결과 나일강 서쪽에 있던 파윰과 납타 습지와 같은 저지대에서도 사람이 살 수 있게 된 점이다. 이러한 기후 변화는 나일강 삼각주에서 누비아까지 영향을 미쳤다. 고고학적으로 흥미로운 점은 나일강 계곡의 수렵 채집 생활자들이 아석기시대에 이미 식물의 성장을 촉진하고 더 수월한 포유류 사냥을 위해 비옥한 지대에서 일부러 관
목에 불을 놓았다는 사실이다. 더 습하고 기온도 높아진 홀로세의 기후로 인해 나일강 계곡 식물군은 훨씬 더 풍부해졌고 식용 가능한 야생식물도 더 많아졌다. 

 

자주 쏟아지는 몬순 기후의 비는 이 지역을 더욱 비옥하게 하는 데 크게 일조했다. 이러한 변화는 나일강 계곡에만 국한되지 않고 북아프리카 전체에 해당되는 사하라와 사헬 지역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홀로세가 시작되면서 나일강은 서서히 오늘날과 같은 물길을 갖춰나갔다. 늦어도 기원전 7000년경에는 파 호수가 생성되었다. 이 호수는 하와라 수로를 통해 나일강에서 물을 공급받았다. 나일강 양안의 상습 범람 지역에는 매우 다양한 풀이 자라는 다습한 초지가 분포되어 있었다. 

 

이 초지가 끝나는 곳에는 습지가 발달했고 강에서 더 멀리 떨어진 곳, 즉 비옥한 지역이 끝나고 건조 지대에 가까운 곳에서는 아카시아, 야자수, 타마리스크 나무와 그외 다른 관목 종이 자라는 사바나형의 숲생태계가 발달했다. 이러한 새로운 생활 환경은 사냥을 위한 풍부하고 다양한 동물상을 제공했고 따라서 선사시대 사람들에게 매력적인 주거 환경이 되었다.


나일강 계곡의 아석기시대가 고고학적으로 남긴 유물은 손에 꼽을 정도다. 기원전 8000년에서 기원전 6800년까지 나온 가장 오래된 아석기 공작물은 나일강 계곡 누비아 지역에서 나온 것이다. (이 유물의 이름은 이석기들이 발견된 유적지인 아르히미안과 샤마르히안 및 아스완 지방 근처의 엘카비안의 이름을 따라 부른다.) 이곳의 경제 방식은 와디 쿠바니야 지역과 많은 공통점을 보이지만 오록스, 가젤, 야생 소, 염소 등 몸집이 큰 포유류의 사냥이 더 중요했다는 점에서는 차이를 보인다. 그 밖에 이곳 사람들은 하마와 거북이도 식용했다. 

 

나일강 계곡에 아석기시대 유적지가 거의 없는 이유는 상습적인 홍수로 인해 그 시기 잔해가 두꺼운 퇴적층 아래 깔려 있어서 고고학자들이 발견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에 비해 파 저지에 있는 유적지는 훨씬 양호한 상태다. 그런 까닭에 이곳의 아석기시대는 나일강 계곡의 그 어느 지역보다 파악하기 더 용이하다. 이 시기의 유물은 이곳에서 파 B 문화로 불리며 카루니안 문화라고도 한다. 이 유적지는 기원전 6000년대와 기원전 5000년대에 속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카루니안 주거지는 현재 파 호수 북부와 서부 지역에서 주로 발견되는데 계절적으로만 이용되었음이 확실하다. 돌의 가공 제작은 아석기적 특징을 보인다. 대표적인 도구로는 칼 끌 등 세석기가 있으며 화살촉도 포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