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북독일의 평야 지대와 스칸디나비아반도의 남부
북독일의 평야지대와 스칸디나비아반도의 남부에서는 기원전 4000년대에서 기원전 3000년대로의 전환기 동안 후기 신석기시대가 시작되었다. 에르테뵐레 문화에 이어 푼넬비커 문화가 성립되었고 이와 더불어 생산 경제로의 이행이 일어났으며, 식물 재배와 가축 사육, 구리 가공 기술이 도입되었다.
기원전 3000년대 중반 이후 바퀴와 소가 끄는 수레도 출현했다. 동물이 끄는 쟁기(아드Ard라고 함)도 도입되어 경작이 훨씬 효율적으로 이루어졌을 가능성도 있다. 외알밀, 에머밀, 보통밀, 보리 등을 경작했고, 소, 양, 염소, 돼지를 가축으로 길렀다. 새로운 경작지와 방목지를 얻기 위해 불을 놓는 일이 점점 더 많아졌다.
이러한 경향은 기원전 2800년경 푼넬비커 문화 후속으로 나타났던 단독장 문화에서 더욱 자주 나타났다. 이로 인해 최소한 기원전 2000년대에 들어서는 점차 지형이 변형되었다. 삼림은 감소했고 초원 지대는 확장되었다. 초원 지대에서는 겨울 동안 가축에게 먹일 건초를 마련할 수 있었다. 이는 농경도 중요하긴 했지만 가축 사육에 주된 의미가 있었다는 인상을 준다.
이런 경제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처음에 푼넬비커 문화는 띠무늬 토기가 남쪽에서 일으켰던 변화에 비해 별로 큰 변화를 일으키지 못했다. 가축 사육과 농경이 갖는 중요성이 점점 커져갔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고기잡이, 바다표범 사냥, 대형 야생동물 사냥이 식량 조달의 중요한 기초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즉 수백 년 동안 푼넬비커 문화인의 식량에서 경작물이 차지하는 비율은 제한되어 있었다. 스칸디나비아의 많은 지역은 자연 조건 때문에 농경에 적합하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노르웨이, 스웨덴 북부, 핀란드 지역의 사람들은 오랫동안 고기잡이와 사냥에 의존해 살았다.
북부 유럽의 푼넬비커 문화권에서는 주로 고기잡이와 사냥에 이용되었던 계절용 주거지가 존속했다. 이렇게 이곳의 계절용 주거지는 유럽에서 가장 오랫동안 명맥을 이어갔다. 하지만 동시에 이곳에서도 큰 건축물이 있는 장기적으로 이용되는 주거지가 나타났다. 이와 더불어 범지역적인 의미를 띠는 제의 장소도 존재했다. 기본적으로 푼넬비커 문화가 존속하는 동안에 인구가 증가하고 주거 지역이 확장되었다고 가정할 수 있다.
3만제곱미터에서 30만제곱미터로 확연히 커진 주거지 면적이 이를 증명해준다. 보른홀름 지역의 주거지 및 그 외 다른 곳의 주거지는 20미터에 달하는 긴 집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 집은 중앙에 대들보를 일렬로 세운 후 맞배지붕을 올려 지었다. 신석기시대 전기와 중기 중부 유럽에서 있었던 집을 떠올리게 하는 형태다. 이에 더해 원형 건물도 있었지만, 이 건물의 기능은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 나아가 푼넬비커 문화에서는 핵심 방어 지역을 여러 겹으로 보호하는 야루프 형의 방어 시설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기원전 2000년대 중반부터 나타난 이 방어 시설은 다른 곳보다 돌출되어 있는 언덕 또는 더 많게는 산등성이의 불쑥 솟아 있는 암석이 있는 곳에 설치되었고 그중에는 도랑 방어 시설을 여러 겹으로 둘러쳐 외부를 차단시킨 곳도 있었다.
야루프 제1기에는 도랑 시설과 목책 시스템을 이 주거지 주변 멀리까지 확대해 설치했다. 이 방어 시설은 원형 내지는 삼각형이었고 내부 면적은 2헥타르에서 20헥타르 사이였다. 흥미로운 점은 도랑이 방어 목적이 아니라 숭배 제의적 행위와 연관이 있었다는 점이다. 도랑 안에는 일부러 그곳에 가져다둔 것이 분명한 형태가 완전한 용기들이 있었고 용구와 도구 세트 또한 들어있었다. 게다가 많은 동물 뼈, 더불어 인간 해골 잔해가 출토됐는데, 동물과 인간이 희생 제물로 쓰였음을 암시하고 있다. 불에 태운 흔적 또한 빠지지 않고 발견되었다. 이 잔해들은 도랑 안에서 뚜렷한 지층을 형성했다.
대규모 제의 행사가 있을 때마다 남은 잔해가 도랑에 채워지고 그 위로 비슷한 성격의 퇴적층이 또 쌓이는 일이 반복되었기 때문이다.
푼넬비커 문화 시기부터 희생 제물을 매장하는 차원에서 호박 장신구, 규석으로 만든 손도끼, 심지어 구리로 만든 물건까지(뷔그홀름 지역) 묻어놓은 유적이 발견된다. 이와 더불어 드물게 메가론 양식의 제사용 건물이 발견되기도 한다. 이런 건물은 정사각형 또는 직사각형 중앙 홀이 있고, 중앙 홀의 세로 벽이 연장되어 현관 공간의 일부를 이룬다. 현관은 일종의 개방형 공간으로 문이나 벽 없이 테라스처럼 외부와 연결되어 있었다.
이 유적에 대해 분명한 해석을 제시할 수는 없지만 일반적인 주거 건물이 아니었다는 것만큼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때문에 숭배 의식이나 제의용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해석이 가장 설득력 있어 보인다. 요컨대 자루프 형태의 유적지는 제의 중심지로서 범지역적 의미를 띠었다.
즉 멀리 떨어져 사는 사람들까지도 특정한 행사가 있을 때면 숭배 의식을 행하기 위해 이 장소에 모였다. 사람들은 이런 장소를 건립, 확장, 관리했고 이는 엄청난 공동 노동이 투입된 결과였다. 이런 수고가 중심기관의 지휘 없이 행해졌다고는 생각하기 힘들다. 때문에 사회 구조에 대한 문제가 다시금 제기된다. 이런 추측은 동시기에 나타난 거석 무덤(큰 돌 무덤)
의 의미와도 부합한다. 거석 무덤은 한 가문이 이끄는 지도층이 존재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서가 되기 때문이다.
중부 유럽 띠무늬 토기 이후의 공동체에서도 계속 사회적 차별화가 시작된다는 징표가 발견된다. 부장품의 규모나 고분 시설의 웅장함 등이 바로 그런 것이다. 지상에서 관찰할 수 있는 무덤으로는 기원전 3800년경 이후의 중부 독일 발베르크 문화의 봉분을 들 수 있는데 이는 육안으로 볼 수 있는 최초의 무덤 유적이다. 이 무덤은 망자의 사회적 신분을 나타내고 다음 세대에게 기억의 장소로 기능한다는 점에서 공동체 존속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한 육안으로 볼 수 있는 무덤은 신석기시대 후기 사람들의 표현 욕구를 반영한다. 이런 표현 욕구를 또 엿볼 수 있는 곳으로는 파시파리 시내의 한 지구 타입 무덤이 있는데, 이 무덤은 세로로 긴 봉분의로 시신은 1구만 안치되어 있다. 내부가 여러 칸으로 나뉘어 있는 이 무덤은 기원전 4800년 파리 분지 띠무늬 토기 문화의 후속 문화에 속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생활문화정보' 카테고리의 다른 글
플라이스토세 말엽의 수렵 채집 생활자 (0) | 2023.04.10 |
---|---|
개인의 재발견, 유럽의 비커 문화 (0) | 2023.04.10 |
바덴뷔르템베르크의 페더제습지에 위치한 제키르히-아흐비젠 유적지 (0) | 2023.04.10 |
마리차 문화 후기 (0) | 2023.04.08 |
고정된 장소에서의 정착생활, 개혁, 사회 분화 (0) | 2023.04.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