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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슈탈트 심리치료의 역사적 배경

 

 게슈탈트 혁명

고든 휠러(G. Wheeler)는 지난 세기 동안 인간 의식에 네 번의 큰 변화가 있었다고 하면서, 진화론, 정신분석학, 행동주의 심리학, 그리고 게슈탈트혁명을 그 계기로 꼽았는데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Wheeler, 2011).


다윈(C. Darwin)의 진화론은 인간이해에 대한 그 이전 시대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꿔 놓은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었다. 즉, 이전의 신학, 철학, 과학에서는 모두 인간은 신의 창조에 의해 탄생한, 이성을 지닌 특별한 존재로서 다른 동물들과의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간격이 있다고 간주되었는데, 진화론은 이를 무너뜨리고 인간을 다른 동물들과 동일한 선상에서 오직 생물학적 관점에서만 바라보았다. 이는 당시까지 믿어 왔던 종교적·철학적 세계관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으면서 인류 정신사에 큰 충격을 가했다.

게슈탈트혁명
게슈탈트혁명


다음으로 프로이트(S. Fraud)의 정신분석학은 인간의 의식에 대한 이전의 믿음을 마구 뒤흔들어 놓은 또 하나의 큰 사건이었다. '신의 철학과 신학 그리고 과학이 모두 인간이 스스로 주체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는 주체의식을 지녔으며, 그것을 통제하는 것이 이성이라고 믿었다면, 정신분석학은 이를 거꾸로 뒤집어엎었다. 즉, 인간 의식은 아주 조그만 부분에 지나지 않으며, 오히려 더 큰 무의식의 영역이 있어 우리의 생각과 감정, 행동을 지배한다는 발상이었다.


다윈의 진화론에 이어 정신분석학은 인간존재를 더욱 초라한 모습으로 바꿔 놓았다. 더구나 프로이트의 세계관은 19세기 자연과학적 기초에 서 있었으며, 기계론적이었다. 인간의 자아란 결국 거대한 이드 충동과 초자아의 압력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 내지는 심부름꾼 정도로 전락해버렸다. 이제 인간은 더 이상 자유롭게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주체적 · 이성적 존재가 아닌 것이다. 인간행동은 자아, 초자아, 원초아의 충동의 역학관계에 의해 기계적으로 결정된다고 보았다. 정신분석학이 이후 철학, 신학, 문학, 사회학에 끼친 영향은 실로 광범위했으며, 아직도 그 영향은 지속되고 있다.


다음으로 행동주의 심리학의 출현이 가져다준 변화도 지대하다. 파블로프(I. Pavlov)와 왓슨(J. B. Watson), 스키너(B. F. Skinner) 등의 행동주의 심리학은 인간행동을 자극과 반응이라는 두 개념으로 단순화시켜 기계론적으로 설명하였다. 행동주의 심리학에서는 인간을 더 이상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능력을 갖춘 주체적인 정신적 존재로 인정하지 않았다. 모든 행동은 자극과 반응의 '우발적 연계성(contingency)' 차원에서 확률적 설명으로 단순화되었으며, 처벌과 보상으로 어떤 행동도 '조형할(shaping)' 수 있다고 보았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인간행동은 주어진 조건과 상황변인만 알면 결과를 예측할 수 있으며, 상황적 조건을 조작함으로써 행동을 얼마든지 통제 내지는 조종할 수 있다고 보았다.


다윈의 진화론,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 이어 이처럼 행동주의는 인간존재를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벼랑 끝까지 몰아세웠다. 인간은 이제 최소한의 존엄성을 지닌 정신적 존재로 인정받지 못 할 뿐더러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의사결정을 하는 주체적 행위자의 자격도 부여받지 못했다. 여기까지는 정신분석적 세계관에도 내포되어 있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행동주의는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즉, 인간은 이제 동물과 같은 기준으로 관찰되고, 실험되고, 훈련될 수 있다고 믿어
졌으며, 실험자의 의도에 따라 얼마든지 미리 정한 방향으로 행동과 감정, 그리고 생각까지도 조종할 수 있는 대상으로 간주되었다.


인간은 이제 더 이상 자율적인 의지를 지닌 생명체가 아닌 하나의 기계로 전락하게 되었다. 자신이 처한 상황과 환경에 적극적으로 능동적으로 대처해 나가는 행위 주체가 아니라, 단지 외부 자극을 입력(input)' 받아 미리 예상할 수 있는 방향으로 출력(output)'이 가능한 인간 기계가 탄생한 것이다. 바야흐로 이제 인간은 '존재(being)'가 아니라 '대상(object)'이 되어 버렸다. 오늘날 이러한 행동주의이론은 우리의 일상을 광범위하게 파고들었으며,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는 관찰과 실험, 그리고 조종의 대상이 되어 버렸다.

 

한편, 지난 세기에 걸쳐 이렇게 서서히 진행된 도도한 시대의 흐름에 맞서는 새로운 사상이 나타났는데 프란츠 브렌타노(Franz Brentano)와 그의 제자들이 그 흐름을 주도했다. 즉, 카를 슈툼프(Carl Stumpt), 에드문트 후설(Edmund Hussert)에 이어 막스 베르트하이머(Max Wertheimer), 볼프강 쾰러(Wolfgang Kohler), 쿠르트 코프카(Kurt Kollka) 등의 현상학자와 게슈탈트 심리학자들이 그들이었다.


빌헬름 분트(Wilhelm Wundt)의 구조주의 심리학에 반대하며 이들 게슈탈트 심리학자들은 인간은 기계가 아니라 능동적 행위를 하는 정신을 가진 존재라고 주장했다. 인간은 카메라처럼 외부자극을 그냥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기계가 아니라, 그것들을 주체적으로 자신의 필요에 따라 적극적으로 조직화하고, 해석하며, 관계적 맥락 속에서 이해한다는 것이었다.


게슈탈트 치료자들은 이러한 원리를 심리치료 분야에 응용함으로써 게슈탈트 심리이론을 더욱 확장하였다. 게슈탈트 치료자들은 특히 인간 정서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사고, 정서, 신체, 행동의 통합성을 강조하였다. 무엇보다도 게슈탈트치료는 정신분석이나 행동주의와는 달리 개인과 타인, 인간과 환경의 상호 불가분의 관계를 역설하며 인본주의적 제3세력운동을 주도하였다."


현대 뇌 과학, 신경생물학, 생물사회학의 새로운 연구결과들은 게슈탈트치료의 이러한 입장들을 지지하는 증거들을 속속 제시해 주고 있다. 이 분야의 새로운 연구들은 인간의 뇌가 컴퓨터가 아니며, 정서를 중심으로 방향성을 갖고 능동적으로 환경을 조직화하여 이해한다는 것을 밝혀냈다. '거울신경세포(mirror neuron)'의 발견은 또한 인간이 서로 연결된 존재임을 밝혀 주고 있다.


특히, 인간의 뇌는 기계와는 달리 능동적으로 자극을 조직화하며, [자신에게 필요한 방향으로 선택적으로 지각하고, 통합해 나간다는 것을 밝혀냈다.

 

 게슈탈트 치료의 탄생

게슈탈트치료는 독일 출생의 유대계 정신과 의사 프리츠 펄스(Fritz Perls)에 의해 창안된 심리치료이다. 펄스는 베를린에서 태어나서 그곳에서 성장하였으며, 28세에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1925년부터 7년간 정신분석 수련을 받았는데, 이때 그는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고 매우 혼란스러웠으나, 나중에 빌헬름 라이히(Wilhelm Reich)와 카렌 호나이(Karen Homey)에 게 분석을 받으면서 다소 기분이 나아졌다고 술회했다.

 

그는 심리학에도 관심을 가졌으나 빌헬름 분트의 실험심리학에 만족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1926년 프랑크푸르트에서 당시 유명했던 신경정신의학자 쿠르트 골드슈타인(Kurt Goldstein) 을 만나서, 전체로서 통합된 유기체 이론을 접하고 매우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이후 그는 프랑크푸르트와 비엔나, 베를린을 전전하며 오토 페니켈(Otto Fenichel), 도이취(Deutsch), 히트슈반(Hitschwan), 하펠(Happel) 등으로부터 지도감독을 받았다.


1934년 그는 히틀러의 탄압을 피해 남아프리카로 갔는데 여기에서 정신분석학회를 창립하기도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아직 정신분석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다.

 

1936년에 그는 마리엔바드에서 개최된 세계 정신분석학회에 참석하여 '구강적 저항'이라는 이론을 발표했는데, 이때 그의 이론은 프로이트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프로이트의 이러한 보수적인 태도에 실망하여 정신분석으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는 골드슈타인의 유기체 이론과 스머츠(J. C. Smuts)의 생태학 이론을 토대로 개체와 환경을 하나의 전체적인 통합체로 보는 새로운 시각을 확립하기 시작했다. 1947년에는 프로이트의 공격본능 이론을 비판하는 새로운 이론을 개발하여 자아와 허기 그리고 공격성(Ego, Hunger and Aggression)이라는 책으로 펴냈다. 이 책의 저술과 더불어 그는
프로이트 학파와 완전히 결별하였다.

 

1946년에는 미국으로 이주하여 다시 이 책을 발간하였는데, 아직 학계로부터 별 반응을 얻지못했다. 1950년에는 '알아차림(awareness)'에 관한 이론을 정립하는 한편, 처음으로 '게슈탈트치료'라는 용어를 만들었다. 그리고 1951년에는 헤퍼린(R. Hefferline), 폴굿맨(Paul Goodman) 등과 공저로 게슈탈트치료(Gestalt Therapy)』라는 책을 펴냈다.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정신분석이 점차 퇴조하기 시작했으며, 때를 맞추어 유럽으로 부터 실존주의 정신의학 사조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때 게슈탈트치료도 점차 인정을 받기 시작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실존주의 정신의학은 지나치게 복잡한 개념과 언어적 사변 때문에 실망을 가져다준 반면에, 게슈탈트치료는 많은 관심을 끌면서 이른바 제3세력운동이라고 불리는 인본주의 심리학의 흐름을 주도하게 되었다. 펄스가 1970년에 77세의 나이로 죽었을 때 게슈탈트치료는 서구에서 가장 인기 있는 치료법의 하나로 발전해 있었다(Perls, 1993).


게슈탈트치료는 카렌 호나이의 정신분석치료이론을 위시하여 골드슈타인의 유기체 이론 빌헬름 라이히의 신체 이론, 쿠르
트 레빈(Kurt Lewin)의 장이론, 베르트하이머 등의 게슈탈트 심리학, 모레노(J. Moreno)의 사이코드라마, 라인하르트(M.
Reinhardt)의 연극과 예술철학, 하이데거(M. Heidegger)와 마르틴 부버(Martin Buber), 파울 틸리히(Paul Tillich) 등의 실존철학, 그리고 동양사상, 그중에서도 특히 도가(道家)와 선(禪)사상 등의 광범위한 영향을 받으면서 탄생한 치료기법이다.


게슈탈트치료는 이렇게 많은 치료기법과 사상의 영향을 받아 생겨났고, 아직도 그러한 영향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지만, 결코 그것들을 단순히 혼합해서 만든 비빔밥은 아니다. 게슈탈트치료는 외부로부터의 영향들을 독자적인 관점에서 통합함으로써 하나의 새로운 정체성을 확립하였다. 또한 게슈탈트치료는 항상 새로운 경험과 이론에 개방되어 있어 끊임없이 그 폭과 깊이를 넓혀 나가고 있다.
게슈탈트치료는 어떤 다른 치료기법들보다도 개방적이다. 그것은 게슈탈트치료가 어느 고정된 교의를 고집하지 않기 때문이다. 게슈탈트치료는 다른 치료이론이나 치료기법들과의 접촉을 통해 항상 지속적으로 변화 · 발전해 왔으며, 현재도 발전하고 있다.

 

게슈탈트치료는 정신분석을 포함한 요소주의 심리학에 반대하여 게슈탈트 심리학의 영향하에 과정적이고 종합적인 심리학 운동으로 나타났다. 그래서 개체를 여러 개의 심리적인 요소로 분할하여 분석하기보다는, 전체 장(field)의 관점에서 통합적으로 이해하려고 시도했다.


한편, 게슈탈트 심리학이 지각연구에만 국한한 데 반해 게슈탈트치료는 그 적용범위를 사고, 감정, 신체감각, 행동 등 모든 유기체 영역으로 확장시켰다. 게슈탈트치료는 게슈탈트 심리학의 이론 중에서 특히 다음의 관점들을 치료이론에 도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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