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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부처 얼굴

디섹션 2023. 4. 2. 18:32

돌부처 얼굴

정장에 넥타이를 맨 파보 누르미 Parno Numa가 마치 달리기 출발 준비 자세를 취하듯 몸을 앞으로 구부린 채 멋지게 차려입은 남녀와 함께 찍은 사진이 있다. 그 남녀는 경주에서 피스톨을 휘두르는 출발 신호원과 닮아 보인다. 1924년 할리우드에서 찍은 이 사진에서 누르미는 지면을 응시하며 수수께끼 같은 웃음을 짓고 있다. 

 

사진사는 그의 야윈 얼굴에 번진 미소를 포착해내고, 그 표정 안에서 뜻 모를 무언가를 살짝 읽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 미소는 사진 속에 보이는 부부 한 쌍과 함께 자리하게 되어서 짓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무성영화 시대에 가장 잘나가던 최고의 흥행 스타 더글러스 페어뱅크스Doughas Faitanks와 메리 픽포드Mary Pickfont었던 것이다. 

 

핀란드돌부처
핀란드돌부처

 

아마도 그들에게는 누르미가 늘 짓고 다니던 스핑크스 같은 무뚝뚝한 표정을 떨쳐내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던 모양이다. 누르미는 신비로운 인물이었다. 

 

그는 1920년대 내내 마치 기계처럼 정기적으로 세계기록을 갈아치웠던 핀란드의 비범한 육상 천재였다. 파보 누르미는 1897년 핀란드의 투르쿠에서 태어났고, 살아남은 4명의 형제 가운데 맏이였다. 그들은 엄격한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으며, 부엌을 다른 노동자 가족에게 임대해주고, 대신 온 가족이 방 한 칸에 함께 모여살았다. 

 

아버지 요한 프레드리크 Johan Fredrik는 소작농 출신이었지만, 부인인 마틸다 빌헬르미나Mathilda Wilhelmina와 결혼할 무렵에는 목수 일을 하고 있었다. 그는 병약했고 심장도 약했으며 자주 졸도하곤 했다. 1910년에 아버지가 쉰 살의 나이로 죽자, 파보는 겨우 열세 살의 어린 나이로 집안의 가장이 되었다.


그 무렵 그는 이미 자신의 인생 경로를 확실히 정해두고 있었다. 날렵한 어머니에게서 재능과 활동적인 체질을 물려받은 그는 달리기 선수가 될작정이었다.


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그는 학교를 떠나 일을 해야 했다. 심부름꾼이 된 그는 무거운 손수레를 끌고 투르쿠의 언덕길을 다니면서 다리 힘과 의지력을 키웠다. 운동을 위해 채식주의자가 되었고 커피를 끊었다. 6년 동안 누르미는 고기, 커피, 차, 알코올과 담배를 섭취하지 않았고, 그 나이 또래의 다른 사람들과 절연한 채 훈련과 금욕의 삶을 살았다. 사람들이 카페
에 모여 노닥거리고 있을 때, 그는 언제나 한결같은 마음으로 홀로 진지하게 집 근처 숲을 달렸다.


그는 장기적인 안목을 갖고 있었다. 1912년 여름, 수천 명의 핀란드 소년들이 요하네스 콜레마이넨의 올림픽 금메달에 자극받아 훈련을 시작했다. 많은 소년들이 과도한 훈련으로 제 풀에 지쳐버렸지만, 누르미는 아니었다. 그는 이후 몇 년간에 걸쳐서 3주 내지 4주를 한 번의 훈련 기간으로 삼아 1~4마일의 거리를 달리며 훈련하는 방식으로 힘을 분배했다. 그는
열일곱 살 때부터 정식으로 시합에 출전하기 시작했고, 그다음 해에는 3,000미터를 9분 30초에, 그리고 5,000미터를 15분 57초에 주파했다. 하지만 이 정도는 그리 빠른 편이 아니었고, 아직은 막판 스퍼트 능력도 부족 했다. 

 

순간적인 전력 질주 훈련과 속도 강화 훈련을 강도 높게 하고 난 후에야 비로소 누구도 두렵지 않은 실력을 갖추게 되었다. 그는 스키 타는 횟수를 줄이고, 조금은 덜 금욕적으로 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고기를 먹고, 적은 양이지만 차와 커피도 마시기 시작했다. 그러나 주요 식단은 여전히 시리얼과 우유였다.


열아홉 살이 되자 그는 자신의 훈련 프로그램을 확장했다. 하루에 15마일(24킬로미터) 이상을 소화하는 엄청난 양의 걷기 훈련을 보탰고, 일주일에 다섯 차례씩 중간에 스퍼트를 포함하여 1~5마일의 거리를 달렸다.


이런 훈련에 뒤이어 체조 연습이 이어졌다. 1919년에 파보 누르미는 군 복무를 시작했고, 부대가 이동할 때 그냥 행군을 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군장으로 장거리를 뛰어감으로써 사람들을 기절초풍하게 만들었다. 도로에서 건들판에서건, 어떤 날씨에서도 그는 다른 사람들을 압도했다.

 

1919년 그에게 전기가 마련되었다. 그는 훈련할 때나 시합할 때나 항상 스톱워치를 가지고 달리기 시작했고, 그래서 섬세한 속도 감각을 기를 수 있었다. 그가 움켜쥔 시계는 그를 상징하는 징표가 되었고, 그는 결승선을 향해 갈 때 자신의 보속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을 확신하며 트랙 안쪽으로 시계를 내던지곤 했다. 누르미가 달리면서 초침을 흘끗 들여다볼 때, 경쟁자들은 초조해했고 관중은 매료되었다. 그는 초침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스톱워치는 그의 달리기에 수학적인 요소를 더해주었고, 사람들은 경주 도중에 전략을 계산하는 게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누르미는 큰 차이로 기록을 깨뜨리고 싶은 욕구가 없었다. 조금씩 자주 기록을 개선해나가는 것이 그의 적성에 더 잘 맞았던 것이다. 누르미는 속도를 높이고 보폭을 넓히기 위해 철로를 자주 찾아갔다.

 

그는 기차의 오른편에서 달리면서 왼손으로 기차의 마지막 칸을 붙잡고 달렸다. 그는 느리게 달리는 기차의 뒤편에서 이런 연습을 계속했고, 승객들이 자신을 가리키며 쳐다보는 와중에 자신의 보폭을 넓히고 달리기 능력을 향상시켰다. 평지나 언덕을 올라갈 때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내리막길에서는 속도가 정말로 빨라졌지만, 그것도 누르미에게는 큰 도움이 되었다. 이제 독립국이 된 핀란드는 1920년 앤트워프 올림픽에 선수들을 출전시켰다. 핀란드의 스타이자 메달 유망주는 누르미였고 그는 1만 미터에서 금메달을, 5,000미터에서 은메달을 따냈다.

 

1920년대 내내 파보 누르미와 그의 핀란드 동료 주자들은 천상의 별처럼 반짝반짝 빛났다. 핀란드가 이룩한 달리기의 기적은 기자들과 관중 그리고 의료계 권위자들을 모두 매료시켰다. 핀란드 사람들은 1,500미터 이상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빨랐고, 1912년에서 1940년 사이에 무려 70회 이상의 세계기록을 수립했다. 그들을 이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볼은 움푹 들어가고 광대뼈는 툭 튀어나왔으며, 몸통에 힘줄이 불거진 서너 명의 핀란드 선수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달리는 모습을 보면, 그들은 마치 달리기를 위해 특별히 만들어진 사람들 같았다.

 

1924년 올림픽에서 2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에 1,500미터와 5,000미터에서 우승을 차지한 후 누르미는 춤을 추러 나이트클럽을 찾아갔다. 핀란드의 한 기자가 무대 위에서 춤을 추고 있는 누르미를 보고 놀랐지만, 누르미는 그런 긴장감 넘치는 달리기 시합 이후에 춤을 추며 몸을 이완시키는게 중요하다는 걸 알았다. 그는 엿새 동안 5개의 올림픽 금메달을 땄는 데, 3개는 개인 종목이었고, 2개는 단체 종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