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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 컴백 '헨리 로노'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하는 모든 일에서 춤꾼이 된다. 그들이 어떻게 움직이건 상관없이 그들 안의 춤꾼은 모습을 드러낸다. 물론 그게 도대체 무엇인지 꼭 집어 말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확실히 우아하고 품위 있는 무언가가 존재한다. 그야말로 타고나길 철두철미한 주자인 사람들이 있다. 케냐 출신의 헨리 로노Henry Rono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수영하는육상선수
수영하는육상선수

 

그는 더 멀리 더 빠르게 달릴 수 있도록 자연이 손수 빚어 만든 두 발로 달리는 영양과도 같은 인간이었다. 로노는 워싱턴 주립대학이 있는 미국 풀먼Pullman 시의 군중들 틈에서 금방 눈에 띄는 사람이었다.

 

그건 단지 그가 흑인이 몇 명 안 되는 마을에 사는 아프리카인이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의 미끄러지는 듯한 걸음걸이와 긴 다리 그리고 걸을 때 등짝이 들썩들썩거리는 모습이 마치 사바나를 가로질러 이동하는 데나 적합한 동작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의 모든 몸동작은 포장도로와 자동차 문화를 접해보지 못하고 자란 한 남자를 그대로 말해주었다. 그는 마치 자동차란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듯 좌우를 살펴지도 않은 채 길을 건너곤 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주 그를 걱정했다.


1976년 미국 대학촌의 환경은 케냐 고지대의 환경과는 전혀 달랐다. 로노의 모국어는 난디Nandi족의 언어였고, 미국에 도착했을 때 그는 영어를 거의 할 줄 몰랐다. 언어 문제는 그의 일상생활을 힘들게 했는데, 특히 그의 코치인 '수다쟁이' 존 채플린John Chaplin의 말이 굉장히 빨라서 알아듣기 어려웠던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로노는 거의 모든 경주에서 승리했다. 그는 자신에게 장학금을 주면서 무상 교육을 시켜주는 세계 최고의 부자나라에서 그곳의 생활 방식에 적응하는 길 외에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의 학업을 특별히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은 없었고, 설사 형편없는 학점이 나오더라도 채플린의 지인들이 모든 문제를 바로잡아주곤 했다. 

 

로노는 미국의 대학에 공짜로 편입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동시에 세계 최대의 육상 시장에 거저 들어갈 수 있게 된 점을 감사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가 이 일을 얼마나 싫어했으며, 평소에 얼마나 심한 향수병에 시달렸는지 몰랐다. 그가 하루빨리 미국화되고 미국의 문화 코드를 이해해서 제대로 된 미국인처럼 행동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았다. 케냐에 거주하는 미국인 운동선수라면 과연 케냐의 생활 방식과 문화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빨리 적응하려고 했을까? 과연 그가 고향에 대한 향수 없이 리프트 밸리 Rift Valley 에서 소위 원시적인 생활에 무조건 적응해나가려 했을까?


헨리 로노는 1952년에 리프트 밸리의 난디 힐스Nandi Hills에 있는 킵타라 Kiptaragon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두 살 때 삼촌의 자전거에 탔다가 떨어져 바퀴살에 다리가 끼는 바람에 발목이 부러지는 사고를 당했다. 어머니의 큰 시름 속에, 그는 그 후로 4년 동안 일어서서 걷지 못했고 여섯 살이 되어서야 보통 아이들처럼 걸을 수 있었다.


그 지역의 많은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그 무렵 그의 아버지는 백인 소유의 농장에서 일하고 있었고, 어머니와 아이들은 집안일과 소젖 짜는 일을 했다. 어느 날 아버지가 트랙터로 밭을 갈고 있을 때, 커다란 뱀이 앞바퀴를 타고 넘어오는 것이 보였다. 아버지는 너무 무서워서 트랙터에서 뛰어 내린다는 것이 그만 쟁기 날 위로 떨어져 즉사하고 말았다.


가족들에게는 힘겨운 재난이었다. 난디족 사람들은 아들이 여섯 살이 될 때까지는 어머니가 양육하지만 그 이후로는 아버지가 키우기 때문에, 특히 어린 소년에게 이 사고는 더욱 고통스런 것이었다. 열 살이 되면 소년들은 남자로서의 의무를 떠맡는다. 사냥을 하고, 밭에 나가 일도 하고, 짐승도 길렀다. 2명의 강인한 여성들이 헨리를 키웠는데, 바로 어머니와
할머니였다. 하지만 그는 아버지의 부재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다시 걷는 법을 배운 그는 학교에 가지 않고 이웃집에서 양치는 일을 하다가 결국 당국의 경고를 받게 되었다. 그는 열 살 때 학교를 다니기 시작했고, 늦게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어린 시절의 이 두 가지 사건은 헨리의 성격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나중에 커다란 육상 경기장에서 그가 시합하는 것을 본 사람들 중에 어린 시절 그가 겪은 가난과 생존 투쟁 그리고 그 과정에서 품게 된 그의 꿈에 대해 알았던 사람은 아마 거의 없었을 것이다. 로노는 가혹한 조건 속에서 단련되었지만, 그의 영혼에 깊은 흉터가 새겨진 것도 사실이었다.


헨리의 가족들은 부족의 전통을 굳게 신봉했다. 그가 열 살 때 그의 가족은 학교와 교회라는 매개를 통해 서구 문명에 더 많이 노출되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부족의 관습에 따라 아래쪽 앞니 2개를 뽑았다. 이를 뽑는 동안 마취도 하지 않은 아이가 고통을 참고 가만히 앉아 있어야 하는 이 의식은 이 부족 사이에서도 점차 사라져가고 있었다. 마을에서 이 의식을 수행하던 남자는 헨리가 자신의 오두막을 찾아 들어와 입을 벌리고 앉았을 때 깜짝 놀랐다. "나는 네가 막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고 알고 있는데.
이 틈새로 바람이 새 나가서 영어를 제대로 말할 수 없을걸."

 

어머니는 로노가 상징적이지만 고통스러운 이 의식을 견뎌내길 원했는 데, 의외로 이 의식에는 실용적인 측면도 있었다. 만일 병이 나서 입이 부으면, 이 빠진 틈새를 통해 음식을 먹일 수 있었던 것이다.


로노는 학교에서 축구를 했지만 학비를 마련하기가 부담스러웠다. 어머니 ·소 다섯 마리, 양 다섯 마리, 염소 마리 그리고 케냐 돈 500실링 (학비를 충당할 정도가 되는 금액이었다)을 받고 헨리의 여동생을 군인에게 시집보내야 했다. 그리고 모자라는 돈을 벌기 위해 헨리는 차밭에서 일했다. 1968년이 되었을 무렵 그는 주자가 되는 꿈을 품게 되었다.


그해에 로노는 멕시코시티 올림픽 1,500미터 종목에서 킵 케이노kip Keino가 금메달을 땄다는 소식을 라디오에서 들었다. 그 소식은 케냐 전역으로 들불처럼 퍼졌고, 그 나라에 영구적인 변화를 불러왔다. 그때부터 케나는 주자들의 나라로 불리게 된 것이다. 로노와 마찬가지로 난디 부족 사람이었던 케이노는 새로운 국민적 영웅이 되었고, 수많은 청소년들에게 자극제가 되었다. 그리고 그중에는 축구를 그만두고 달리기 선수가 되기로 결심한 로노도 포함되어 있었다. 3년 후 케이노는 로노의 집에서 8마일 떨어진 경기장을 찾아와 사람들 앞에서 강연을 했고, 기대에 가득 찬 로노역시 영웅을 보기 위해 그곳에 모인 군중들 속에 섞여 있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모인 바람에 케이노는 두 팔을 들어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 알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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