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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덴뷔르템베르크의 페더제습지에 위치한 제키르히-아흐비젠 유적지

신석기시대 초기에는 각 가정이 각자의 농경지를 따로 갖고 있었지만 기원전 3000년대가 되면서 농경지를 한데 연결해 경영하게 되었다. 당시 소가 끄는 쟁기를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이 또한 서로 연결되어 있는 넓은 농경지에서 훨씬 효과적으
로 사용될 수 있었다. 주거 가옥 뒤에 있는 언덕에는 숲이 펼쳐져 있어서 베리류 등의 채집 열매, 버섯, 헤이즐넛, 사과, 향신료를 위한 식물과 약초 등 다양한 식물을 제공했고, 가축을 풀어놓는 장소가 되기도 했다. 

 

또한 숲에는 사슴, 노루, 오록스, 멧돼지와 그외 다른 야생동물이 살고 있어서 사냥터로도 이용되었다. 그 밖에 새로운 재배 작물이 도입되었는데 그중 파슬리, 딜허브의 일종, 레몬 페퍼민트, 셀러리 등은 지중해 서쪽 지역으로부터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엔 또한 듀럼밀도 재배되었다. 장소에 따라 다른 작물을 경작했다는 사실은 사람들이 자신이 살게 된 장소
와 자연환경에 적응하는 능력이 신장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고기와 우유 공급을 위해 여러 가축을 한데 모아서 기르는 것도 유사한 맥락에서 생각할 수 있다. 

 

신석기시대 주거지는 중부 유럽에서는 대부분 정주형이었지만 여전히 계절적으로만 이용되는 주거지도 존재했다. 이러한 주거지는 주거 환경이 불리한 곳이거나 소금이나 규석 같은 중요한 천연 재료를 얻기 위한 목적으로 설치되었다.


특이한 점은 하천 주거지의 양호한 유물 보존 상태에도 불구하고 동물이나 인간 조각상 등 소형 창작품이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유기 물질로 된 작은 조각상(가령 나무 조각상)의 잔재조차 전혀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가옥 바깥에서는 마감을 한 벽 파편이 발견되기도 했는 데 그중에 몸으로 빚은 후 하얀 석고 색으로 칠한 가슴 모양 장식이 있는 게 있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다른 지역에서는 벽을 장식했다는 것이 확인되지 않는다. 

 

건물 내부에서는 장신구들이 발견되었는데 특히 조개와 달팽이로 만든 구슬이 많이 발견되었다. 그중에는 지중해나 대서양에서 건너온 것들도 있었다. 바덴뷔르템베르크의 호른슈타트-회레 지역 주거지에서 발견된 것같이 한 면에 볼록 튀어나온 혹이 세 개 달린 납작한 동판은 판노니아 평원에까지 왕래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기원전 3900년경에 만들어졌다고 추정되는 이 물건은 알프스 동쪽 끝자락과 헝가리 서부의 일명 벌러톤-라시냐 지층에서 나온 동판과 유사해 양자 간에 매우 밀접한 연관이 있음이 확인되며, 보호지역으로까지 유입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 발굴 유물은 알프스산맥 북쪽 끝자락 하천 주거지가 판노니아 평원 및 알프스를 넘어 북이탈리아에까지 이르는 광범위한 교류·무역 네트워크를 갖고 있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외츠탈러 알프스 빙하에서 발견된 기원전 3350년경으로 추정되는 시신(일명 외치Otzi)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즉 이 시신은 '세계를 유랑하는 여행자'로 북이탈리아에서 남독일로 가는 중이었는지도 모른다. 빙하 속에서 매우 잘 보존된 그의 몸에는 문신이 그려져 있고 복장을 다 갖춰 입고 유기물질로 된 물건과 구리 손도끼 등의 장비를 갖고
있었다. 이 시신으로 인해 이 시기는 우리에게 훨씬 더 생생하게 다가올 수 있었다.


이미 기원전 4000년대 후반경 알프스 북쪽 지역에서는 구리 채굴과 초기 형태의 금속 가공이 시작되었는데, 이는 비슈하임 문화의 구리로 만든 끌과 고리를 보면 알 수 있다. 신석기 후기와 말기 동안 구리 야금술은 알프스 전역으로 대거 확산되었다. 구리로 만든 물건들, 특히 도나우강 주변에서 생산된 물건이 기원전 3000년대 초기 이후, 푼넬비커 문화의 전반기 동안 오데르강과 엘베강을 넘어 북독일 평야와 발트해 서쪽에 위치한 문화권에까지 점점 더 많이 전파되었다.

 

이 장소들에서는 소형 도구와 장신구 외에 단도, 납작한 손도끼, 망치도끼도 발견되었다. 발칸반도와 판노니아 평원에서와 같이 중부 유럽에서도 금속 가공은 먼저 크기가 작은 물건부터 시작했고 이후 손이 더 많이 가고 구리도 더 많이 필요한 대형 도구를 제작했다. 이때 흥미로운 점은 금속 가공이 점차 중요한 의미를 띠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수천 년에 걸쳐 발전
되어온 신석기 문화의 구조에 일단은 별다른 변화를 가져오지 않았다는 점이다.

 

북독일의 평야지대와 스칸디나비아반도의 남부에서는 기원전 4000년 대에서 기원전 3000년대로의 전환기 동안 후기 신석기시대가 시작되었다. 에르테뵐레 문화에 이어 푼넬비커 문화가 성립되었고 이와 더불어 생산 경제로의 이행이 일어났으며, 식물 재배와 가축 사육, 구리 가공 기술이 도입되었다. 

 

기원전 3000년대 중반 이후 바퀴와 소가 끄는 수레도 출현했다. 동물이 끄는 쟁기(아드Ard 라고 함)도 도입되어 경작이 훨씬 효율적으로 이루어졌을 가능성도 있다. 외알밀, 에머밀, 보통밀, 보리 등을 경작했고, 소, 양, 염소, 돼지를 가축으로 길렀다. 새로운 경작지와 방목지를 얻기 위해 불을 놓는 일이 점점 더 많아졌다. 이러한 경향은 기원전 2800년경 푼넬비커 문화 후속으로 나타났던 단독장 문화에서 더욱 자주 나타났다. 

 

이로 인해 최소한 기원전 2000년대에 들어서는 점차지형이 변형되었다. 삼림은 감소했고 초원 지대는 확장되었다. 초원지대 에서는 겨울 동안 가축에게 먹일 건초를 마련할 수 있었다. 이는 농경도 중요하긴 했지만 가축 사육에 주된 의미가 있었다는 인상을 준다. 이런 경제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처음에 푼넬비커 문화는 띠무늬 토기가 남쪽에서 일으켰던 변화에 비해 별로 큰 변화를 일으키지 못했다. 가축 사육과 농경이 갖는 중요성이 점점 커져갔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고기잡이, 바다표범 사냥, 대형 야생동물 사냥이 식량 조달의 중요한 기초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즉 수백 년 동안 푼넬비커 문화인의 식량에서 경작물이 차지하는 비율은 제한되어 있었다. 스칸디나비아의 많은 지역은 자연 조건 때문에 농경에 적합하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노르웨이, 스웨덴 북부, 핀란드 지역의 사람들은 오랫동안 고기잡이와 사냥에 의존해 살았다. 한 북부 유럽의 푼넬비커 문화권에서는 주로 고기잡이와 사냥에 이용되었던 계절용 주거지가 존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