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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차 문화 후기

디섹션 2023. 4. 8. 00:38

마리차 문화 후기

마리차 문화 후기, 트라키아의 스타라고라 지역의 아이 나르에서 발견된 채굴장과 빈차 문화 초기에서 후기의 이행기로 추정되는 시기, 철문 협곡 근처에 있었던 광산인 루드나 글라바는 이미 기원전 4000년대 중반경에 구리가 채굴되었음을 증명한다. 하지만 야금술의 개별 단계와 가공 방식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많지 않다. 기원전 4000년대 후반기인 동기시대 후기에는 코자데르멘, 구멜니차, 카라노보 IV기, 바르나 문화들이 존재했다. 

 

이 문화 시기에는 망치 도끼, 손도끼, 끌 등 구리로 만든 중량급 도구가 대량 출토되었다. 이 도구들은 틀 두 개로 주조되었음이 확실하며 금속 가공에 대한 발전된 지식 없이는 제작이 불가능한 것이었다. 

 

모든 가구가 각자의 필요를 위해 이러한 도구를 직접 제작한 것은 아닐 게 분명하며, 전문 인력들이 있었으리라 추정된다. 이들은 후계자에게 지식을 가르쳤고 작업장 내에서 수 세대에 걸쳐 이를 전수했을 것이다.

 

종교 분야에서도 전문화가 눈에 띄게 이루어졌다. 유럽 동남부 동기시대의 인간 형상 조각들은 그 표현이 매우 도식적인 경향을 띤다. 이러한 경향은 더욱 뚜렷해졌고 결국 거의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 기하학적 요소들로 이루어진 우상이 만들어지기까지 했다.

 

오브차로보의 한 건물에서는 작은 여자 조각상이 탁자, 의자, 제단 같은 모양의 물건, 식기와 함께 발견되었다. 이는 성스러운 장소에서라면 흔히 볼 수 있는 전형적인 광경이었다. 이 장소는 촌락공동체가 공동으로 제의 행위를 했던 곳이었으리
라 추측된다. 커스치오아렐레에서 나온 여러 번 채색된 나무 기둥이 두개 있는 건물도 신성한 장소 또는 숭배 제의를 위한 구조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숭배 의식은 제의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집전했을 것으로 여겨지며, 일종의 사제 집단을 위한 교육이 있었을 수도 있다. 

 

이런 유적지들에서 살았던 거주 연합체는 동시에 제의적 공동체이기도 했던 것일까? 어쨌든 직조를 하는 사람이든 구리 대장장이든 사제든 간에 이들은 일반적으로 얻기 힘든 지식과 특별한 기술을 바탕으로 주거 공동체 내에서 특정한 기능을 수행했다. 이를 위해 이들은 식량 생산의 의무를 면제받았고 대부분 농경에 종사하던 주거 구릉지 주민 공동체로부터 필
요 물품을 공급받았다.


유럽 동남부의 동기시대 주거 구릉지가 평등한 형태였고 사회적 신분에 따른 분화는 찾아볼 수 없었던 데 반해, 이 시기의 무덤에서는 고급스러운 부장품으로 자신의 지위를 알리려고 했던 최초의 징표가 발견된다.


특히 바르나 고분에서는 금으로 만든 물건이 포함된 풍부한 부장품이 발견되었다. 고분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무기를 들고있는 남자들이 높은 대우를 받았다는 것이다. 이들의 무덤에는 손잡이가 금으로 되어 있는 화려한 모양의 도끼, 왕홀, 곤봉과 더불어 특별한 지위를 나타내는 다른 물건들이 부장되어 있었다. 주거 구릉지가 계속 북상함에 따라 주거지 장벽 밖 공동묘지 또한 점점 더 많아졌다. 이렇게 해서 시신을 주거지 내에 매장하던 전형적인 신석기시대의 풍습은 기원전
4000년 전반기 동안 대폭 사라졌다. 장제 규칙은 더 엄격해졌다.

 

특히 성별에 따른 구분은 이전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됐다. 이에 더해 지역적 특성 또한 변수로 작용했다. 한 예로 등을 똑바로 펴고 누운 유골과 몸을 구부리고 누운 유골은 흑해 서해안에 있었던 바르나 문화의 네크로 폴리스고대 도시 밖에 위치해 있던 대형 공동묘지 시설에서만 발견된다. 지위를 나타내는 다수의 상징과 보석이 들어간 물건은 사회적 위계가 있었음을 가장 잘 보여주는 유물이다. 특히 눈에 띄는 점은 귀중품과 금으로 만든 물건이 구리 가공용 작업 용구와 거의 늘 함께 발견된다는 사실이다.

 

이로써 추정하건대 구리 대장장이는 유럽 동남부의 동기시대 사회에서 특별한 위치를 점했던 게 아닐까 한다. 불가리아 동북부에서는 시신을 구부린 자세로 왼쪽을 향하게 해서 안치했고 지도층 남자들은 공동묘지에 묻힐 때 보통 구리로 만든 중량급 도구가 함께 묻혀 다른 무덤과 분명히 구분이 되었으며, 또 토기 일습을 풍족하게 넣기도 했다. 동일한 시기에 문테니아에서는 시신을 안치하는 자세가 정해져 있지 않았던 듯하며(오른쪽 또는 왼쪽으로 구부린 자세 모두 있다), 빈약한 부장품으로 인해 기원전 4000년 대 후반기 도나우강 남쪽의 여타 지역들과 현저한 차이를 보인다.


기원전 4000년대 중반 직후 판노니아 평원의 동쪽 지역에서도 철문 협곡과 흑해 사이 지역에서와 유사한 티서폴가르 문화가 발흥했고, 장례 문화에서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이곳에서도 주거지 방어벽 밖에 공동묘지들이 설치되었는데, 발견된 고분들은 장례 규칙이 매우 발달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같은 시기 헝가리 동부에는 티서강과 동쪽의 지류를 따라 공동묘지가 많이 존재했다. 이 묘지들에서는 처음으로 성별에 따라 엄격히 다른 매장,방식과 부장품이 나타난다.